필름시대 끝난 사실 코닥만 몰랐다

Feb 13, 2011

1975년 코닥회사는 세계 최초로 디지털카메라를 개발했습니다. 필름 없이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 기술은 그 당시로서는 세계를 놀라게 할 만큼 혁신적이었습니다. 필름 카메라로 이미 세계를 제패했던 코닥이 다시 한번 세계 시장을 독점할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하지만 1885년부터 필름 사진 시장을 지배해왔던 공룡기업 코닥은 필름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리지 못했습니다. 시장의 흐름을 읽고 더 좋은 디지털카메라 기술을 선보여야 했음에도 다른 회사들과 엄청난 격차가 난다는 자신감 하나로 기술 개발에 안이했고 결국 소니, 캐논, 니콘, 후지가 시장에 뛰어들어 디지털카메라가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후에야 자신들의 오만을 깨달았습니다. 다급해진 코닥은 1995년 ‘코닥 디지털 사이언스’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디지털카메라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소비자들에게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이미 다른 회사들이 디지털카메라 시장을 선점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고 기존의 필름시장의 1등이라는 자만심으로 새로운 시장을 준비하지 못한 탓에 1990년대 <포춘>이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이었던 코닥의 명성은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자만에 의해 실패한 기업의 사례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또 하나의 기업이 있습니다. 바로 자동차회사 GM입니다. 1895년 명문 MIT공대를 졸업한 한 청년이 아버지에게서 빌린 돈으로 자동차 부품용 베어링 회사를 사들이며 GM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GM은 시보레, 폰티악, 올스모빌, 뷰익, 캐딜락까지 단계별로 차종과 가격, 브랜드를 차별화하면서 당시 최고의 자동차 회사였던 포드를 제치고 1931년 세계 자동차 시장 1위에 올라 서게 됩니다. 작은 베어링 공장에서 시작한지 30여년 만에 세계 일류의 거대 기업이 된 것입니다. 당시 GM은 제작한 자동차의 성능도 좋았지만 창의적인 마케팅으로 승승장구할 수 있었습니다. GM은 세계 최초로 자동차 할부금융 판매 방식을 채용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정말 획기적인 마케팅이었습니다. 한때 GM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했던지 “세계 자동차 역사는 곧 GM 의 역사다.” 라는 찬사가 쏟아졌고, 심지어 “GM에게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다.” 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GM은 미국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세계 최고의 기업이었습니다.

그러나 80여년의 세월 동안 세계 일류 기업으로 자동차 업계를 좌지우지 하던 GM은 한순간에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세계 최고라는 자만심으로 시장을 읽지 못했으며, 긴장이 풀린 경영진의 방만한 경영과 종업원들의 태만으로 자동차 품질이 저하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GM은 1970년대 석유 위기이후 자동차 업계의 새로운 트랜드였던 고효율 저연료 자동차 개발을 무시하고 기름 먹는 하마 같은 대형 고급차의 개발에만 집중했습니다. 일부 경영진에서도 연료 절약형 자동차 개발의 시급성을 지적했고 심지어 상원과 하원에서 에너지 대책 차원에서 연료 절약형 자동차 개발을 법으로 제도화 하려는 움직임까지 막대한 비용을 들여 로비까지 해가며 저지할 정도로 그들의 자만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일본의 자동차 업계가 연료 절약형 소형차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을 무시한 채 시대의 변화와 소비자 취향의 변화와 거대한 트랜드의 변화를 읽지 못한 것입니다. 세계를 호령하던 GM의 몰락은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자신이 최고라는 자신감이 자만으로 변질되면서 GM은 스스로 무너질 뿐만 아니라 미국 국가경제까지 무너뜨리는 원인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는 독주악기를 위해 작곡된 곡 중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곡은 1900년대 전까지는 일반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한 고서점에서 200년 동안 잠자고 있던 이 곡은 1889년 13살의 소년 파블로 카잘스가 우연히 악보를 발견하면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후 카잘스는 피나는 연구와 연습 끝에 12년 뒤에 첫 공개 연주회를 열었고 그가 48세 되던 해에 레코딩을 남기기로 동의했습니다. 이로써 바흐의 무반주 첼로의 첫 레코딩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무려 35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연주를 갈고 닦은 후에야 레코딩에 동의한 것입니다. 카잘스의 역사적인 레코딩은 오늘날까지도 무반주 첼로 모음곡 해석에 기초를 놓은 모범적인 해석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그는 젊은 날부터 세계 음악팬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첼리스트였지만 진정 최고가 되기 위해, 그리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카잘스는 자신이 거장이 된 비결을 묻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재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고 적성에도 맞지 않는 첼리스트였다. 하지만 온 마음으로 연습을 했고 사람들은 그런 나를 첼로의 거장이라고 불렀다. 숨이 다하는 날까지 나는 첼로를 켤 것이다.”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사상가 소크라테스는 많은 제자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학자였지만 집에서는 “쓸모없는 잡담이나 하는 무능한 남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생활력에 문제가 있었으니 아내의 불평이 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활력 문제가 원인이었기는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최고라고 존경하는 그를 비난하는 단 한 사람, 아내 크산티페가 없었다면 소크라테스가 인간과 세상사에 대해 그토록 깊이 있는 사고를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세계 3대 악처로 소문난 소크라테스 아내의 악담은 소크라테스의 철학 사상만큼이나 대단했으니 소크라테스는 상당한 시련을 받은 셈입니다. 비록 악담일지언정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혹평이 있었기에 자만에 빠지지 않고, 끊임없이 공부할 수 있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해집니다. 광야 40년간의 연단의 목적이 가나안땅에 들어가 잘살게 될 때 이스라엘 백성이 자만에 빠져 하나님을 잊게 될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잘살게 되자 하나님을 배신하여 다시 고난을 받게 됩니다. 교만은 멸망하는 지름길이요, 겸손은 축복의 지름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