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자와 승리자의 차이

Sep 11, 2021

패배자와 승리자의 차이

“완공된 예배당의 관리자로, 혹은 예배당 의자나 운반하는 사람으로 자기 소임을 다했다고 만족하는 사람은 이미 그 순간부터 패배자다. 지어 나갈 교회당을 가슴 속에 품은 이는 이미 승리자다. 사랑이 승리를 낳는다…. 지능은 사랑을 위해 봉사할 때에야 비로소 그 가치가 빛난다.” -생텍쥐페리 ‘전시 조종사' 중.

프랑스의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1900~1944)는 엄혹한 시대를 살다 간 사람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용기 조종사였다. 전쟁이 끝나기 1년 전 어느 날, 그는 정찰 비행을 떠났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 유명한 ‘어린 왕자'를 출간한 지 1년 남짓 지난 때였다. 위 문장이 실린 ‘전시 조종사’를 출간한 지 2년 반이 지난 때였다. 생텍쥐페리는 시체조차 우리에게 남기지 않았으나, 그의 문장은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산다는 것이 전쟁 같다는 비유가 성립하는 한, 그의 문장은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예배당 안에서 거저 앉을 자리를 얻었는데 왜 패배자인가? 힘들이지 않고 이익을 얻었는데 왜 패배했다고 하는가? 이익을 계산하거나 추구한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익의 최대화는 삶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패배한 것이다. 이익을 추구하라. 그러나 답하라. 도대체 무엇을 위한 이익의 추구란 말인가? 이익을 정교하게 계산해내는 지능만 가지고는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실제 ‘전시 조종사’의 저 구절 앞뒤로, 인간이 가진 이성과 지능의 한계에 대한 사색이 실려 있다.

아무리 열심히 손익을 따져도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좀처럼 찾을 수 없다. 생텍쥐페리에 따르면, 오직 ‘사랑’만이 삶의 목적이라는 어려운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이익을 계산하는 지능은 그 사랑에 봉사할 때 비로소 진정한 가치가 있다. 예배당 안에서 앉을 자리를 거저 확보하려 드는 이는 패배했다. 그는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은 희생을 동반한다. 예배당에 앉아 있는 사람은 두 종류가 있다. 희생한 사람과 희생하는 것을 구경한 사람.  

사랑은 무엇이고,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사랑은 이익의 계산을 넘어선 곳에 있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향한 통로이며 사랑이 흐르는 통로이다.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의 상징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에 동참하는 것이 사랑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희생을 배우는 곳이 교회이며 희생의 실천을 시작하는 곳이 교회이다. 그 교회가 세상을 위해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한다. 

교회당은 어디에 있는가? 교회당은 밀실에 있지 않고 광장에 있다. 오늘날 교회당은 마천루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당이 한창 지어지던 중세와 르네상스 시절에 교회당은 다른 큰 건물이 없는 광장의 한복판에서 그 초월적인 위용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거대한 교회당에 가야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교회당을 지을 수 있는가? 거대한 교회당은 크기 때문에 혼자 지을 수 없다. 함께 지어야 하기에 공적인 건물이다. 사랑을 향한 통로는 함께 지어야 한다. 교회당은 그 거대함 때문에 단시간에 지을 수 없다.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해서 1882년에 짓기 시작한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당은 아직도 짓고 있는 중이다. 대개 사람들은 거대한 교회당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가슴에 품고 간다. 

어떻게 하면 가슴속에 거대한 교회당의 모습을 그릴 수 있는가? 미국의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1938~1988)는 소설 ‘대교회당’에서 말한다. 교회당을 그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맹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은 거대한 교회당을 그리지 못한다고. ‘대교회당’에서 맹인은 자신을 환대하지 않던 눈뜬 이에게 묻는다. “뭔가 믿는 게 있나요?” 눈뜬 이는 대답한다. “딱히 믿는 것은 없어요. 그래서 힘드네요. ” 눈이 있으면 눈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보기가 어렵고 믿기가 어렵다.

맹인은 눈뜨고 있는 사람의 손을 쥐고 함께 종이에 교회당을 그려나간다. 눈을 뜨면 삶의 수단이 보일지 몰라도 삶의 목적은 보이지 않는다. 삶의 목적을 보기 위해서는 묵상해야 하고, 묵상할 때는 눈을 감는다. 거대한 교회당을 그린 사람들은 험한 시련을 통과한 이들이었다. 생텍쥐페리와 스가 아쓰코와 레이먼드 카버는 일찍 가족을 잃거나, 가난에 시달리거나, 중독에서 허우적대거나, 비참한 전쟁을 겪거나, 시대의 광기를 목도한 사람이었다. 

모두 ‘비참한 리얼리즘’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알게 된 사람들이다. 신의 존재를 알기 전까지는 인간의 한계를 전부로 아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비참한 시련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경험하게 되면서 한계가 달라진다. 신의 한계를 알게 된 자가 하나님의 거대함을 알고 세상을 품는 하나님의 성전의 크기를 알게 된다. 보이는 크기를 넘어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거대한 목표의 크기를 품을 수 있다. 이것이 패배자와 승리자의 크기의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