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줄 타기
외줄 타기
1858년 6월 30일 나이아가라에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 들었다. 나이아가라 폭포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3.300미터가 넘는 길이의 줄을 팽팽하게 매어 놓고 세계적인 줄타기 곡예사 찰스 블론딘(Charles Blondin)이 줄 타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특별 열차를 타고 많은 사람들이 각 지역으로부터 모여들었다. 드디어 찰스 블론딘은 10m 가량 되는 긴 장대를 손에 들고 균형을 잡으면서 줄을 타기 시작하자 관중들은 손에 땀을 쥐고 숨을 죽이며 지켜보았다.
뒤로 걸어서 건너기, 눈을 가리고 건너기, 자전거 타고 건너기등 자유 자재로 줄타기 묘기를 보여준 블론딘은 곡예가 끝 날 때 쯤 관중들을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존경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내가 사람을 등에 업고 이 폭포를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러자 관중들은 “그럼요. 당신은 사람을 업고도 충분히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블론딘은 “그럼 내 등에 업혀서 나와 같이 이 폭포를 건너갈 사람 한 분만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외쳤다.
블론딘의 말이 떨어지자 관중들은 이내 침묵 속에 잠겼고 주변은 폭포 소리만 가득할 뿐 적막감이 흘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힘있게 믿는다고 하던 사람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행여나 블론딘으로부터 지명 당할까 봐 눈이 마주칠세라 고개를 들지 못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도 없다고 판단한 블론딘은 관중 가운데 서있는 한 남자에게 “당신은 날 믿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남자는 조금도 주저 없이 “난 당신을 믿습니다. 기꺼이 당신 등에 업히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블론딘의 등에 몸을 맡겼다.
남자를 등에 없는 블론딘은 이제까지보다 더 신중하게 로프에 올라가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등에 업힌 남자가 스스로의 생명을 바쳐 자기를 신뢰했다는 사실을 군중에게 알려주듯이 그의 얼굴에는 강 건너에 도착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선명했다. 마침내 블론딘은 나이아가라폭포를 건너는데 성공했고 숨죽이고 지켜보던 관중들은 환호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블론딘의 등에 업혀 폭포를 건넌 사람이 누구냐이다.
그는 해리 콜코드(Harry Colcord)였고 그는 블론딘의 매니저였다. 관중들은 그의 묘기를 봤고 그가 얼마나 줄타기를 잘 하는지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블론딘을 믿는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등에 업혀 나이아가라폭포를 건너려 하지 않았다. 블론딘의 스토리에는 신뢰(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숨겨져 있다. 신뢰의 본질은 말이 아니라 행동에 있다. 상대방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부정적인 결과가 발생할 수 있음에도 상대방을 믿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신뢰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지식적 동의가 아니다. 전인적으로 맡기는 행동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 구속을 동의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내 생명을 맡기는 행위이다. 나 자신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는 것이다. 나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고는 말에 머무는 이론적 구원이지 실제 구원은 아니다. 천국을 인정하는 것과 들어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천국을 인정하지만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지극히 적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믿는다. 그리고 우리 안에 영생이 있음을 믿는다. 그렇다면 만약에 누군가가 우리의 머리에 총부리를 겨누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방아쇠를 당길 것이고, 안 믿는다고 하면 살려준다고 했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만약 죽는 것이 무서워 예수를 부인한다면 그의 믿음은 구원에 대하여 지식적으로 동의한 것이지 예수의 생명을 가진 것은 아닌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런 말씀을 로마서에 남겼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니라 (로마서 10장 10절) 이 말씀을 새기면서 그렇게 해야지 결심하며 머리에 저장만 하면 구원받을까? 당연히 대부분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고백하면 구원받는다고 당당히 주장한다. 목사님들로부터 그리 배웠으니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게 참 간단하고 쉬운 것이다. 물론 구원도 쉽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만 하면 되니 이 얼마나 간단한가?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 서신을 쓰던 시대적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 시대는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 그 순간 돌에 맞아서 순교하던 시대였다. 그 어느 누구도 함부로 쉽게 나 예수 믿습니다 라고 말하기 힘든 시대였다. 설령,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조차도 어지간한 믿음과 용기가 아니면 함부로 신앙고백을 할만한 여건이 아니었다. 성령으로 거듭나 주님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려놓은 자가 아니면 결단코 이런 신앙고백을 못했다.
구원 길은 블론딘 처럼 목숨 걸고 외줄 타는 것과 같다. 목숨을 맡긴 사람만 좁은 길을 갈 수 있다. 좁은 길은 그냥 불편한 길이 아니다. 목숨을 건 외줄 타기이다. 십자가의 길은 외줄타기이다. 예수 믿는 것은 예수만이 유일한 길이며 유일한 진리이며 유일한 생명의 외줄 타기이다. 천국은 말로 가는 것이 아이라 몸이 가는 것이다. 생명을 맡기고 십자가의 외줄을 타는 사람은 영생의 주인공이 되고 무서워 구경만 하는 사람은 결국 생명을 잃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