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진 무덤
무덤을 찾아간 여자들 -- (무덤을 찾아간 여자들, 숨어있는 제자들)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도망가서 숨어 있었고,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은 무덤을 찾아왔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다. 결국 두 종류의 사람이었다. 따랐으나 일시적으로 따라 다닌 사람이 있었고 끝까지 따라 간 사람이 있었다. 다같이 시작하지만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이 있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사람이 있다. 무덤을 찾아간 여자들은 골고다 언덕까지 따라 갔었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무덤까지 찾아왔다.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 앞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다. 예수님에 대한 자세가 상황에 의해 변질되지 않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다. 믿음은 반드시 연단과 시련의 과정을 거친다. 그 이유는 믿음의 순도를 높이고 강도를 높이기 위함이다. 끝까지 가지 아니하면 모든 것이 무효다. 천신만고 끝에 천국 문 앞에 도착했으나 그 자리에서 포기하면 천국을 향해 아예 출발조차 하지 않은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돌문이 열리다 -- (사람이 여는문, 하나님이 여시는 문)마가 16:2-3에 보면 여자들이 무덤에 가면서 돌문 여는 것을 걱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염려와는 달리 마태 28:1-4에 보면, 여자들이 무덤에 찾아갔을 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돌문을 열어 주시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여자들의 힘으로 불가능한 문제가 하나님에 의해 열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돌문이 열리는 사건이 무덤을 찾아간 여자들에게는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사건이요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는 사건이지만 무덤을 지키던 군사들에게는 승리가 패배로 모든 수고가 실패로 바뀌는 사건이다. 인간의 힘으로 열 수 없는 문을 하나님이 여신다. 사람이 열 수 없는 무덤문은 하나님만이 여실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인생의 문을 열어 주시는 사람들이다. 사람의 힘으로 열 수있는 문도 많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시지 않으면 안 되는 문이 있다. 죽음의 문이다. 심판의 문이다. 천국 문이다.
여자들의 근심 -- (상황에 대한 두가지 반응)시체가 없는 상황이 기뻐할 상황인가 아니면 슬퍼하고 낙심할 상황인가? 기쁜 상황과 슬픈 상황이 별도의 상황으로 존재할 수도 있지만 같은 상황이 얼마든지 다른 상황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부활을 모르거나 믿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분명히 낙심하고 걱정할 상황지만 부활을 알고 믿는 상태라면 기쁘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수한 사건을 만난다. 그러나 믿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예외없이 모든 상황과 환경이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정적인 의미와 긍정적인 의미, 절망적인 의미와 희망적인 의미, 성공적인 의미와 실패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선택은 나의 몫이다. 나의 선택에 따라 같은 상황이 축복적인 상황이 될수도 아닐수도 있다. 같은 인생길을 가면서 생명의 길로 가는사람이 있고 죽음의 길로 가는 사람이 있다. 천국 길과 지옥 길이 문앞에 가서 결정되는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결정되는 것이다.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 (죽어있는 예수, 살아있는 예수)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는것이 아니고 아직도 죽어 있는 예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 속에는 아직도 예수님이 죽어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고, 죽어있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다. 죽음이라는 불가능을 넘을 수 없는 예수로 믿고 있는 것이다. 무능한 예수로 믿느냐 전능한 예수로 믿느냐 유한한 예수로 믿느냐 무한한 예수로 믿느냐. 사람마다 다른 예수를 믿는다. 예수의 종류가 다양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믿음이 다른 것이다. 나의 믿음이 죽어 있으면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다. 나의 믿음이 살아 있으면 하나님은 살아 있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셔도 우리의 믿음에 따라 역사하시겠다고 하셨다. 우리의 삶은 철저히 믿음의 제약 아래 있다. 문제는 상황의 조건이 아니라 믿음의 상태에 있다. 무덤 안에 예수님이 없듯이 죽은 믿음 안에는 예수님이 없다.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장소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갈릴리에서 하신 말씀대로 살아나셨다. 어떤 상황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없이 방해받지 않고 그대로 역사하시고 이루어진다. 우리의 생각대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역사하신다. 인간의 기준대로라면 죽어 있어야 하는데 이미 하나님이 말씀하신데로 살아나신 것이다. 갈릴리에서의 말씀과 무덤에서의 말씀과 같은 말씀이며 같은 능력이다. 장소와 시간과 상황의 변화에 전혀 영향받지 않고 역사하신다. 사람의 수준으로는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문제는 내 자신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세이다. 말씀 자체가 환경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것처럼 내 자신의 말씀에 대한 자세가 변동이 없어야 한다.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 (과거의 말씀, 현재의 말씀) 하나님의 속성은 바로 말씀의 속성이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이 그의 말씀의 속성이다. 과거에 받은 말씀이 과거로 끝나지 않고 지금도 내 안에 존재하느냐의 여부가 중요하다. 많은 말씀을 받았어도 과거로 끝나면 더 이상 말씀의 역사는 없다. 언제 받은 말씀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그 말씀이 내 안에 존재하느냐가 중요하다. 물론 객관적으로 모든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역사하신다. 나에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유효하려면 나에게 지금 그 말씀이 있어야 한다. 객관적으로는 하나님이 계셔도 주관적으로 내 안에 계셔야 나와 관계있는 하나님이 된다. 각자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느냐 아니냐는 내안에 말씀이 살아 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여자들이 부활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기억한 후 부활을 인정하고 믿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