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의 승리를 위해 10년을 준비한 지압
베트남 북쪽 국경 근처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베트민의 저항을 무력화 시키는 임무를 부여 받고 1953년 5월 프랑스 극동주둔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나바르 장군은 지형을 꿰뚫고 있는 베트민과의 전면전 보다 한정된 지역에서의 전투가 훨씬 효과적임을 파악하고 베트민의 주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는 디엔비엔프를 공습하여 하루만에 빼앗아 전투 거점으로 확보했다. 디엔비엔프는 라오스로 통하는 주요 통로이자 중국과 연결된 주보급로가 만나는 요충지로 베트민의 생명줄과 같은 곳이기에 반드시 반격해올것을 확신했다. 또한 지형이 분지로된 천혜 요새이기에 수비와 공격에도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나바르 장군은 총체적으로 전력을 분석한 결과 베트민이 다음과 같은 세가지 이유로 함부로 공격해오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첫째, 지금까지의 정보에 의해 베트민은 5만명을 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이중 일부 부대만이 공격해올 것이므로 3개 사단을 배치한 프랑스군이 훨씬 우세하다. 둘째, 베트민의 화력은 프랑스군과 비교가 안된다. 베트민은 75밀리 이하의 곡사포 60개가 전부다. 이 대포의 사정거리로는 프랑스 지휘본부를 직접 공격할 수 없다. 결국 접근 공격을 시도해야 하는데 그때는 보유하고 있는 탱크와 전투기로 가볍게 제압할 수 있다.셋째, 베트민은 길이 없는 산악과 정글에서 대규모 현대식 무기와 식량 운반이 불가능하여 3,4일이면 백기 투항할 것이다. 반면 프랑스군은 항시 항공 보급이 가능하므로 장기 전투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서방 언론도 한결같이 동의했다.
그러나 베트민의 지압 장군은 이들의 예상을 완벽하게 깨버렸다.전력과 화력면에서 절대 열세에 있던 지압 장군의 군대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지압 장군은 디엔비엔프 전투를 위해 10년을 준비했다. 베트민을 창설할 때만 해도 디엔비엔프에서 전투를 벌일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 못했지만 그는 정면 대결을 준비해 왔다. 프랑스의 탄압때문에 북쪽 산악 지대에서 숨어 지내던 지압은 산속의 소수 민족들을 모집하여 10년을 내다 보면서 오합지졸이었던 그들을 양성했다. 결국 10만명이 넘는 대규모 군대가 만들어졌다. 모든 국지전에서 되도록 적은 규모로 게릴라전을 펴서 군대 규모가 오랫동안 노출되지 않았다. 디엔비엔프 전투에 참여한 병력만 프랑스의 정보와는 달리 5개 사단으로 6만명이 훨씬 넘었다.
무기나 화력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베트민 창설 당시에는 프랑스군이 버리고간 고장난 총이나 지뢰를 고쳐 무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디엔비엔프 전투 시점에는 이미 800문의 기관총, 수천 자루의 자동소총, 수백만발의 탄환과 긴 사정거리의 105밀리 곡사포와 75밀리 대포를 200대와, 공중 폭격에 대응할 지대공 미사일까지 보유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전의 어떤 전투에서도 105밀리 곡사포를 사용 못하게 했다. 디엔비엔프 전투를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큰 무기를 그 험준한 지역까지 어떻게 옮길 수 있었을까? 지압 장군 역시 디엔비엔프 전투를 결정짓는 요인은 무기와 식량의 수송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매일 프랑스 공군이 정찰하는 상황에서 도로도 없는 산악지대에서 대규모 병력과 무기 수송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나바르가 안심하고 베트민을 기다린 것도 이때문이었다.
지압 장군은 프랑스가 디엔비엔프를 장악할 때부터 곧 베트남의 운명을 결정짓는 큰 전투가 벌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적의 규모나 지형으로 보아 기존 방법으로는 프랑스군을 이길 수 없음이 분명했다. 단 기간에 끝날 전투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는 대규모 병력과 무기,식량 수송 계획을 짰다. 강을 건널때는 다리 밑에 밧줄을 연결하여 보급품을 날랐고, 200대가 넘는 대포는 사람들의 몸에 줄을 묶어 100Km 정글을 뚫었다. 한번에 1인치씩 하루에 800미터씩, 3개월동안 조금씩 조용히 운반했다.장기전에 대비한 식량수송은 자전거를 수레로 개조하여 밤에만 물건을 운반했다.6만3천명의 병력중에서 1만 5천명이 보급부대로, 여자와 나이 어린 청년들이 대부분이었다. 베트민은 야간 작업으로 수백Km의 참호를 파서 프랑스군 코앞에 까지 다가갔다.
완벽하게 준비가 끝났음에도 지압 장군은 곧바로 공격하지 않았다. 완벽한 기회를 기다렸다. 3월 하순부터 시작되는 우기를 기다렸다. 공군의 네이팜탄이 물에 젖은 정글에서 무력화 되고, 비행의 어려움으로 보급이 어려워질것을 노린 것입니다. 우기가 시작되자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됐다. 탄알과 보급이 끊긴 프랑스군은 55일만에 항복하고 말았다. 3천명의 사망자, 5천명의 부상자를 내고, 1만2천명이 포로가 된 이전투는 단일 전투에서 프랑스가 경험한 최대의 패배였다. 이전투로 지압 장군은 프랑스 식민지배의 사슬을 끊었다. 동시에 그의 이름을 세계사에 등장 시켰다. 또 지압 장군은 미국과의 싸움에서도 베트남이 처한 상황과 목표를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경솔하게 정면대결을 피하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초조하게 만들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가안보 수석과 국무장관을 지낸 키신저는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이렇게 말했다. “베트콩에게는 지지 않는 것이 곧 승리를 의미했지만, 미군은 이기지 않는한 패배하는 전쟁이었다.” 미군은 복무기간을 빨리 채워야 하는 강박감을 가지고 전쟁에 임했지만, 베트민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사명감을 가지고 전쟁에 임했다. 미국은 빨리이겨야만 하는 싸움이었지만 베트민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패배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승리를 위해서는 10년이 걸려도 준비할 수 있고, 100년이 걸려도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이 승리할 수 있는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