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찾아서

Apr 11, 2015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어버린 것 세 가지가 나온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아들. 이 이야기는 성경 전체의 추방과 귀향이 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양 한마리, 동전 한개, 아들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잃어버린 인류 전체를 위한 소망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아들(실제는 떠나버린 아들이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잃어버린 아들이다)은 더 나은 삶을 기대하고 먼 나라로 떠나지만 실망하고 만다. 아버지 집의 음식을 기억하며 아버지와 고향 집을 그리워하기 시작한다. '고향'의 의미는 모든 사람들의 삶에 각별한 의 미를 갖는다. 다양한 출신의 이민자로 이루어진 미국인들은 가장 다양한 고향을 가지고 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찾기 위해 매년 엄청난 돈을 쓴다. 고향 같이 애착을 느끼는 장소가 없는 어린이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어떤 대상에 애착을 형성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사람들은 고향집에 온 것같이 느끼게 해주는 장소, 시간, 사람들로부터 정서적 안정을 느낀다.

고향의 대한 추억은 영혼을 풍성하게 하는 자양분과 같다. 우리는 모두 둘째 아들과 같다. 항상 고향집을 갈망하는 방랑자(나그네)들이 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여행하지만 결코 목적지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집과 가족은 그저 길을 가다 만나는 여인숙에 불과하며, 진정한 의미의 집은 아니다. 집은 계속 우리를 피한다. 집은 이토록 중요함에도 왜 우리를 피하는 것일까? 성경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제를 보면 알 수 있다. 창세기 시작 부분에는 모든 사람이 그 자신을 돌아갈 수 없는 방랑자로 느끼는 이유를 보여준다. 즉 우리가 정말 집에 온 것처럼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나타나 있다. 창세기를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정원에서 살도록 창조되 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살도록 만들어진 곳은, 사랑에서 분리되는 일도 없고 퇴락도 질병도 없는 곳이었다. 이곳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의 삶, 그의 임재 안에서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섬기며 누리는 삶이 주어졌었다.바로 거기가 우리의 원래 집이며 우리는 진정 한 고향에서 살도록 창조 됐었다. 하나님이 그 집의 '아버지'였으며 우리는 그의 권위 앞에 복종하기를 거부했고 그의 간섭이 싫어 그에 게 등을 돌리고 멀어져 갔다. 둘째 아들과 똑같은 이유로 우리의 집을 잃어버렸다.그 결과는 방랑이고 유배였다. 그 이후로 우리(인류)는 계속 영적인 유배 생활 속에서 갈팡질팡 방황하며 살아왔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갈망과 맞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 온것이다. 우리는 "뛰어도 지치지 않는" 육체를 소망하지만, 질병,노화,죽음을 겪어야 한다. 우리는 영원한 사랑이 필요하지만, 우리의 모든 관계는 피할 수 없는 시간의 엔트로피에 갇혀 소멸되고 만다. 우리에게 충실한 사람들도 죽거나 우리 곁을 떠난다. 아니면 우리가 죽거나 그들을 떠나게 된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보다 축복되고 행복한 삶을 위해 동분서주 하지만 우리는 끝없이 좌절 할 뿐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꿈과 소망을 온전히 실현하지 못한다. 우리는 잃어버린 집을 재창조하고자 힘써 일할 수도 있겠지만, 진정한 집은 우리가 도망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임재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 주제는 성경에서 몇 번씩 반복해서 등장한다. 아담과 하와가 궁극적인 집에서 유배된 후, 아들 가인은 쉼을 얻지 못하고 방랑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동생 아벨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도망쳐 여러 해 동안 유배 생활을 한다. 후에 야곱이 아들 요셉과 그의 가족이 기근 때문에 고향을 떠나 이집트로 가게 되는데, 이곳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지도 하에 조상의 고향으로 돌아올 때까지 노예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여러 세기 후, 다윗은 왕이 되기 전까지 도망자로 살았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바벨론에서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온 것도 잠깐,  AD 70년에 로마에 의해 나라를 잃고 2천년 동안이나 집이 없는 방랑 생활 을 하게 된다. 1948년에 나라를 되찾게 되는것도 그들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였다. 보이는 땅의 고향 은 찾았으나 하늘의 고향은 요원한 가운데 영적 방랑은 지속되고 있다. 성경이 반복해서 유배의 패턴을 보여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류가 집으로 돌아오고자 갈망하며 애쓰는 유배자의 무리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지는 것이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다. 바벨론에서의 유배 생활 동안 이스라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위대한 귀환과 귀향을 예언했다.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허가를 얻는다. 그러나 유대인들 중 소수만이 실제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갔는데, 그곳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페르시아의 지배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강대국들이 연이어 그들을 침략하고 지배했다.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한 모든 출 애굽과 귀향들은 끝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간들의 내부가 망가져 있기 때문이다. 인류 모두는 이웃나라들과의 지속적인 전쟁만큼이나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투쟁들에 의해 억압받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바로 우리 본성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마음 속에서 잃어버린 고향을 육신의 고향의 회복이나 확보로 대체가 안된다는 것을 모른다는 데에 인간의 어리석음이 있다. 끝없는 문명의 발전과 향상의 추구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지옥으로 치닫고 있다. 문화와 문명의 발달이 찬란한 만큼이나 인류를 고통스러운 방랑자로 만드는 비극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늘나라는 여기있다 저기있다 못하리니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늘나라의 임재가 내 심령 속에 이루어지는 날 우리는 마침내 그리운 고향에 도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