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사는 믿음 (요 11:21-27)
가능 범위의 믿음, 불가능 범위의 믿음 - 찾아오신 예수님을 향해 마르다는 「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하며 「그러나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줄 아나이다」라고 합니다. 문제 해결에 있어 예수님께서 현장에 계시는 것과 계시지 않는 것의 차이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가능성 안에서, 이성적 범위 안에서, 환경적 조건 범위 안에서는 믿으나, 그 범위를 넘어선 불가능한 영역에서는 안 된다는 개념에 붙잡혀 있습니다. 공간적, 조건적, 환경적 조건 범위 안에서 뿐만 아니라, 범위를 넘어서도 전혀 제약 없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 -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하여 마르다는 믿는다고 말하지 않고, 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심에 대하여서 역시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아나이다는 지식이요, 내가 믿나이다는 믿음입니다. 지식(아는 것)과 믿음(믿는 것)을 혼동치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능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아무리 잘 알고 있어도 구원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일 때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오랜 교회생활로 많이 알고 있어도 믿음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아는 것 때문이 아니라 믿음에 의하여 역사 하십니다.
실제적인 믿음, 이론적인 믿음 - 나사로가 다시 산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부활에 관하여 이론적으로 설명 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죽은 상태에서 생명이 돌아와 다시 살아 일어난다는 실제적인 생명의 회복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자체가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 존재이며, 천국과 영생이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으로 아는 데에 그치고 현실에서의 구원과 내세구원을 별개의 문제로 알고, 내세적 천국과 현세적 천국을 다른 것으로 보는 비실제적인 신앙관을 볼 수 있습니다. 현세예수와 내세예수를 다르게 보는 비정상적인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닌 짝퉁 믿음입니다. 내세예수(구원)가 지금예수(구원)입니다.
나사로의 죽음, 마르다의 죽음 - 나사로는 육신적으로 죽었으나, 마르다는 영적으로 죽어 있습니다(육신은 살아있으나). 문제는 죽은 나사로가 문제가 아니라 마르다의 믿음이 죽어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르다의 반 토막 믿음, 아는 믿음, 이론적인 믿음(추상적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마르다에게 있어 예수님은 지식으로는 존재하나, 영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객관적(환경)으로는 예수님이 존재하나 자기 자신 안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실 때에만 환경(실제)의 예수가, 현실의 예수가, 천국의 예수가 믿어집니다.
죽어도 사는 믿음, 영원히 죽지 않는 믿음 - 현실부활 아닌 마지막 날 부활을 말하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생은 죽지 않는 생명이요, 죽어도 다시 사는 생명으로써 믿음도 죽지 않는 믿음이어야 하며, 죽어도 다시 사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영생이신 예수님이 내안에 있으면 죽을 수 없고, 망할 수 없고, 쓰러질 수 없으며, 죽어도 다시살고, 망해도 다시 흥하고, 쓰러져도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